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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할 거 없어.

완료_카르멘.png

  핏기 없는 안색에 음울한 분위기를 베일처럼 두른 여자. 허리까지 오는 먹색 머리카락을 뒤통수에 단단하게 틀어올렸다. 가늘고 탄력 없는 머리카락이 흰 이마 위로 가닥가닥 흩어진다. 푸른 눈동자가 빙판처럼 시리다. 양 뺨과 입술이 붉다. 생기 넘치는 소녀의 붉음이 아니다. 차라리 찬바람에 오래 노출된 살갗이다. 손톱 끝으로 공들여 그은 것처럼 매서운 눈매는 마주보는 사람을 위축시키지만, 사실 그렇게 무서운 사람은 아니다. 긴장했던 게 허탈할 정도다. 웬만해선 앞에 나서지 않고 눈에 띄지 않는다. 소심하거나 주눅 든 인상도 아니다. 사시사철 똑같은 표정으로 제 집 앞마당 가꾸기에만 전념할 것 같은 여자. 키도 훌쩍하니 큰데 말씨나 취향이 구식이라서 어쩐지 ‘설정’한 나이보다 너댓 살쯤 많아 보이는 때가 다반사다. 하긴, 연상을 찾기 어려운 나이다.

 

 

 

 

 

 

 

 

 

 

 

 

 

 

 

 

 

 

 

 

 

 

 

 

 

 

 

 

 

 

 

 

 

 

성격

 

[1 느릿느릿 ] [ 2 희박한 존재감 ] [3 안개 같은 우울 ]

만사가 느릿느릿하다. 잘 변하지 않는다. 긴 시간을 살아가는 방법에 있어서 카르멘은 나무를 모방했다. 그 나무는 하필 가을이면 알록달록 낙엽이 물들고 봄에 새순이 돋는 나무가 아니라 사시사철 푸른 침엽수였던 모양이다. 정말이지 카르멘은 변치 않는다. 종종 직접 그 자신을 가리켜 ‘구식’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인간은 나이를 먹거나 늙지만, 카르멘은 마녀도 그 범주에 해당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고민 끝에 카르멘은 무정물에 쓰이는 묘사를 빌린다. ‘오래 된.’ ‘골동품.’ ‘케케묵은.’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고 나이테를 늘리는 것처럼 카르멘도 아주 천천히 변하기는 한다. 그러나 백 년을 살지 못하고 죽는 인간에게 카르멘은 뒷산에 있는 바위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카르멘에게는 급할 것이 없다. 

 

존재감이 희박하다. 창문에 드리운 레이스 커튼이나 30년쯤 전 엎지른 히비스커스 차가 시트에 남긴 자국 정도의 존재감이랄까. 그가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과는 조금 다른 문제다. 카르멘과 함께하는 것은 얼어붙은 호수 아래를 들여다보는 일과 비슷하다. 몇 년쯤은 밤마다 둥둥 떠다니는 철학적 질문에 시달릴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가?’ 호수 아래는 어두워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믿고 발 뻗으면 편하다. 그러나 깊어서 안 보이는 것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하면? 답이 없다. 호수를 깨 보기 전엔 아래에 무언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으니까. 어차피 호수를 깰 방법은 없고, 선택은 둘 중 하나다. 안 보이니까 속 편하게 없는 것 취급하거나, 아니면 영원한 의심병에 시달리거나. 존재감 없는 카르멘은 함께했던 자들에게 늘 그런 불안을 남겨 왔다. 당신, 나랑 같이 있는 거 맞아? 어느 날 공기 중으로 사라져 버리는 거 아니야? (그런데 정말 사라지기도 한다는 게 기가 막힌 일이다.)

 

카르멘의 주변 공기는 대개 울적하고 침잠한 냄새를 풍긴다. 그건 카르멘이 타고난 기질이다. 카르멘은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차분한 성격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은 ‘저 여자, 집에 우환이라도 있는 걸까?’ 생각한다. 가만히 있어도 장례식 온 사람 같은 분위기인 것이다. 딱히 음침하거나 슬픔에 젖어 있는 건 아니라서 오래 지내다 보면 조금 특이한 점 정도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사람의 시선으로 보기에 카르멘은 어디에나 있을 법한, 차분하고 성실한 여자다.

상실

 

첫사랑

특성 마법

 

냉기

무엇이든 접촉한 것을 얼어붙게 한다. 접촉한 물체를 통해 전도시킬 수도 있다. 발현과 지속은 전적으로 카르멘의 의지에 따른다. 손을 잡았다가 얼음 동상 만들 일은 없다는 뜻이다. 아무래도 여름에 얼음 얼릴 때 아니고서야 별로 쓸모는 없다. 추위를 타지 않는 건 편하지만.

기타사항

 

  1. 이명은 ‘겨울 숲의 유령’이라지만 사실 왕국 얀티스에 겨울 숲 같은 건 없다. 숲 하나를 무단점거하고 겨울을 불러와 불쌍한 이웃 사람들(아마 그 숲에서 나는 사냥감, 땔감, 약초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을)의 출입을 엄금한 적도 없다. 그렇다면 왜 겨울 숲의 유령이라는 이명이 붙었을까? 카르멘도 잘 모른다. 아마 ‘마녀’ 하면 자연히 ‘고립된 숲’을 떠올리게 되는 얀티스 왕국인 고유의 연상 작용이 어김없이 발휘된 결과일 것이다.
     

  2. 오래 살았지만 정신이 완전히 흐려지지는 않았다고 자부한다. 인간 시절의 일도 물 속을 들여다보듯 모호하게나마 기억하고 있다.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아도 혼자 읽는 일기장에라면 쓸 수 있는 정도. 평범하게 나이 든 인간이 천둥번개를 무서워하며 이불 속에서 떨었던 기억, 어머니의 티파티를 기웃거리다 얻어먹었던 산딸기 잼의 맛, 그때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고 생각했던 찻잔의 무늬 따위를 회고하듯이.

    연년생 자매가 있었다. 언니인 카르멘도 특별히 모나게 생기지는 않았지만 동생은 특출나게 예뻤다. 자세한 이목구비는 물에 씻긴 듯 기억나지 않는 지금에 와서도 그 애가 웃을 때 세상에 달이 하나 더 뜬 것만 같았던 감상만은 생생하다. 자연히 모든 사람의 관심이 동생에게로 쏠렸다. 질투했느냐고? 그렇지 않다. 카르멘은 미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동생을 경쟁자이기보다 귀물로 취급하는 법을 배웠다. 보석이 광채를 낸다고 해서 질투하는 사람은 없다.

    소녀들은 자라서 처녀가 되었고 신랑감을 물색할 나이가 되었다. 털어놓지도 티내지도 않았지만 카르멘도 첫사랑을 했다. 관심 바깥에서 살아온 사람답게 카르멘은 조심성이 많았다. 누군가에게 함부로 호감을 가지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런 카르멘이 생각하기에도! 그는 카르멘에게 관심이 있어 보였다. 친절하게 대해 주었고 무거운 것을 옮길 때 도와 주었고 격없이 장난을 치기도 하고 좋아하는 무화과 파이를 챙겨 주었고… 기타 등등. 그러나 그가 마침내 꽃다발을 들고 찾아왔을 때 상대는 카르멘이 아니라 동생이었다. 그는 미래의 처형과 친하게 지내려 했을 뿐이다.

    카르멘은 이번에도 질투를 느끼지는 않았지만 낙담했고 창피했다.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 되지 못해 실망하다니. 감히 그런 기대를 가졌다니. 결혼식 전날, 카르멘은 동생이 쓸 베일에 자수를 놓아 주었다. 그 밤은 엄청나게 길어서 사람의 평생 같았다. 실을 잡아당겨 마무리하는 순간 그는 다른 존재로 거듭났다. 마녀는 꽃을 꺾던 앞뜰에 얼어붙은 발자국을 남기고 떠났다.
     

  3. 마녀는 무엇인가를 잃을 때 마녀가 된다. 카르멘은 그날 잃어버린 것이 첫사랑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밤새 수를 놓으며 카르멘은 포기에 대해 생각했다. 더 이상 얼마나 자신을 포기해야 사랑을 기대하지 않을 수 있는 걸까? 그러다가 마녀가 되어버린 걸 보면 아마 인간이 해낼 수 없는 영역이었던 모양이다.

    결혼식 전날 신부의 언니가 사라지는 사고가 있었지만 신혼부부는 행복했다. 겨울마다 찾아와 그들을 지켜보는 마녀도 그저 남의 일을 보듯 즐거웠다. 이미 ‘상실’한 후였으므로 마녀는 사랑을 쟁취하지 못한 게 전혀 아쉽지 않았다. 동생은 유한한 인간의 사랑을 가졌고 언니는 영원한 마녀의 마법을 가졌다. 이만하면 공평하지. 동생 부부는 50년을 더 해로했다. 그들의 후손을 지켜보는 일은 200년쯤 지났을 때 지겨워졌고, 몇 년 뒤 잊어버렸다.
     

  4. 아이러니하게도 ‘마녀’ 카르멘이 남긴 전설은 대부분 애정사다. 평범한 인간 처녀처럼 가정을 이루어 살다가 훌쩍 떠나기를 반복한 탓이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혈혈단신의 여자를 아내로 맞이해 아이를 낳고 도란도란 살았는데 어느 겨울날 옷가지 속에 눈만 남기고 사라졌더라는 민담은 어느 지역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종종 아이들을 데리고 하늘로 승천했다고도 하고 의심하는 남편을 얼음 동상으로 만든 뒤 사라졌고도 하지만 큰 결말은 같다. 여자는 떠난다.

    카르멘으로 말하자면 별 생각 없이 저지른 일들이다. 왜냐면…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사는 건… 당연하잖아? 따로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기적으로 마녀들끼리 모여 불멸의 삶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수다를 떠는 것도 아니니 남들이 다 하는 방식을 따라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평범한 인간들만큼 지속해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침구를 갈아끼우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늘상 보던 노란 꽃무늬가 질려서 기분도 전환할 겸 하얀색으로 바꾼다. 전형적인 마녀의 사고방식이다. 얼음 동상이니 하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다만.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도, 수발 받는 귀부인으로서의 생활도 해보았지만 어느 순간 양자의 차이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손가락만 튕기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으니 고난도 호화도 의미를 잃었다. 마음에 드는 점이 하나쯤 있었으니 같이 살 결심도 했겠지만 남편들을 사랑했느냐면 그것도 아닐 테다. 수백 년간 카르멘이 낳은 아이들은 두 자릿수를 넘지만 기억에 남은 아이는 없다. 카르멘을 인간과 분리하고, 마녀로서 도드라지게 하는 것이 여기에 있다. 불로불사도, 늘 남들보다 낮은 체온도 아닌, 붙잡으려는 순간 눈처럼 녹아 사라지는 성질.

    그래서 최근의 사태는 카르멘에게 조금 불편하다. 떠나던 날 남긴 발자국이 잘 떠오르지 않을 때, 불어오는 바람에 한기를 느낄 때, 동생의 웃음소리에 가슴이 불타는 꿈을 꾸고 일어날 때마다 카르멘은 이상을 감지한다. 그는 녹고 싶지 않다. 
     

  5. 늘 인간 속에 섞여 사는 건 아니다. 일주일 전까지 루브로 근방에 사는 농부의 아내였는데 오늘 플로스의 전도유망한 청년과 야반도주를 준비하는 처녀로 발견되면 곤란하니까. 지금이 바로 그런 휴지기다. 직전의 가정을 ‘청산’한 지는 15년쯤 되었나…. 

    얼어붙은 수증기가 계시를 허공에 수놓았을 때 카르멘은 생각에 잠겼다. 생각해 보면 700년 넘게 살면서 고립된 숲에는 가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특별히 남편 삼고 싶은 남자도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니, 아직 밟지 못한 땅을 밟아 보는 것도 재미있겠지.
     

  6. 카르멘이 지난 설원에는 발자국이 남지 않는다. 숨결은 찬바람과 같은 온도인 듯 입김으로 피어오르지 않는다. 체온이 놀랄 정도로 낮다. 홑옷 한 겹만 걸치고도 추위를 타지 않는다. 종종 카르멘의 설화는 나부끼는 검은 천이나 먹이를 찾아 내려온 곰을 옛사람들이 여자의 모습으로 착각한 것이리라고 설명된다.
     

  7. 이런저런 점을 제외하면 카르멘은 평범하다. 보통의 여자들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 마법을 쓰지 않고 손으로 직접 하는 요리. 햇볕에 늘어진 고양이의 배. 달콤한 디저트와 희게 세탁된 테이블보 위에 놓인 꽃다발. 보통의 여자들이 싫어하는 것을 싫어한다. 머리카락이 잔뜩 쌓인 방. 불량배들의 거친 욕설. 쓴맛은 700년 넘게 살아도 좋아지는 일이 없었다….

능력치

위력    : ◆◆◆◇◇ (3/5)

정밀도 : ◆◆◇◇◇ (2/5)

지속성 : ◆◆◆◆◆ (5/5)

예감    :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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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men

겨울 숲의 유령, 카르멘

약 750살 · 여성 · 174cm · 보통

불침의 영구동토 / 실체 없는 유령 / 오래된 여자

Commission @liliangaku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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